2011.03.05
향교에 도착하니 출입문이 닫혀있어 서성이는데
지나가던 분이 담을 따라 조금 가면 출입문이 있단다.
이곳의 담장옆에도 커다란 나무가 시간의 무게를 보여준다.
입구에 들어서니 말끔하게 정비된 건물이 정갈하게 자리하고
처마와 댓돌의 선과 굴뚝과 기둥의 선이 엄숙함을 드러낸다.
안마당에 들어서니 좌.우 대칭을 이룬 "明倫堂"을 중심으로 "서제"와 "동제"가
자리하여 간결하고도 흐트러짐 없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이곳은 고려 성종 6년(987년) 전국 12목에 향교가 들어설때 세워졌으며
건물배치는 서울의 문묘와 같이 "前廟後學(앞쪽에 제사공간 뒤쪽에 학습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東齊"는 유생들이 글공부도 하고 유숙하던 기숙사와 같은곳인데,
길다란 회랑이 보여주는 직선의 엄숙함에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건너편의 "西齊"도 "東齊"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모습이 다.
제사공간인 "大成殿"은 출입이 금지되어 들어가 볼수 없어 아쉬우나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어있고 조선 중기 건축양식으로 추정된단다.
담장 너머로 바라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발길을 돌렸다.
복원중인 "서성문"을 구경 하고나서 "완사천"으로 향했다.
시청입구의 도로변에 위치한 "完紗泉"은 고려태조 "王建"이 수군장군으로
목포에 배를 정박시키고 나주를 지나가다가 물가위에 어린 오색의 구름을 보고
다가가니 샘가에 아리따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왕건"이 물 한그릇을 청하자 처녀는 물을 떠서 버들잎을 띄워 건넸다고 한다.
그 처녀가 바로 "장화왕후 오씨부인"으로 고려 제 2대왕인 "혜종"의 어머니다.
그래서 샘물을 마시면 이루고 싶은 꿈이나 아름다운 사랑을 맺을 수 있다는데
수질검사표도 없어서 마실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신라말 고려초에 나주의 호족세력과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는 과정의 역사적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인데, 샘은 "흥룡사"라는 사찰 안에 있었고
"혜종"임금을 모신 사당이 있었으나 조선초에 훼철되었다 하니
지금의 샘이 정말로 "完紗泉"인지 의심이 든다.
여덟 八자 모양의 지붕이 화려한 2층망루를 가진 "南顧門"을 지나서
"羅州驛"을 찾았다.
1913년 7월1일 호남선 개통에 다라 신축된 근대 건축물인데
역사의 기본 구조나 골조,목재등은 초창 당시 그대로 란다.
이곳이 역사적 가치가 큰 것은 1929년 10월 3일 오후 4시경
나주 통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일어난 다툼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인 학생독립운동으로 확산되어 154개교 54,000여명이 참여한,
일제하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학생독립운동의 근원지 라는데 있다.
선열들의 기개를 되새겨 보면서 나주 유람을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