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10
짜지 않고 "대파"의 달콤함이 일품인 공주국밥으로 아침을 먹고
어젯밤 몸을 뉘었던 한옥마을을 잠시 둘러 보고
백제문화전시관으로 향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롭지 않다."는 백제의 건축을 돌아 볼 것이다.
천정전과 5층 목탑의 모형을 둘러 보고
七支刀 모형 앞에서 잠시 머무르며 과거를 돌이켜 본다.
양옆으로 3개의 날이 달려 있어 칠지도란 이름이 붙은 이 칼은
우리나라에는 기록이 없고, 일본서기 신공기에 기록이 등장 하는데
74.9cm의 철검으로 그 당시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technology 제품이다.
백제 전지왕(405-420)이 409년 일본 왕에게 하사한 것인데
전면 35자, 뒷면 27자의 금상감 명문이 있으나 해독이 어려워서
일본이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는 유품으로
"광개토대왕비"와 더불어 "임나일본부설"을 재해석하는 중요한 자료다.
2층에는 그윽한 사유를 하는 금동 미륵반가사유상도 있고
백제를 대표하는 걸작인 "백제금동대향로"가 있다.
국보 제287호인 향로는 능산리 절터의 진흙에 묻혀 있다 발굴된 것으로
높이 61.8cm 몸통지름 19cm 로 大型이며 봉래산을 중심으로 한 신선세계를 보인다.
74개의 산과 164마리의 동물,30여명의 사람,10여개의 식물등이 묘사된 향로는
봉황(?)의 가슴 부위에 2개, 새가 앉은 산봉우리 뒤쪽에 5개,
다섯 악사 앞 산봉우리 뒤쪽에 5개의 구멍이 있어
향을 피우면 운무에 쌓인 신선세계를 보여줄 것으로 생각된다.
전시실을 나온 우리는 사비궁 정문인 正陽門을 지나고
天政殿에 다가 갔다.
외부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내부는 한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이하고
王이 앉아있던 옥좌가 화려하지만,
역사적 유물은 없고 모두가 문헌등을 근거로 복원했다니 마음이 시리다.
陵寺로 발길을 돌리니 거대한 5층 목탑이 시선을 압도 한다.
백제의 왕들이 제를 지내던 王寺를 재현한 것인데
이 역시 국내에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백제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일본 "호류(법륭)사"의 양식을 참고하여 복원 하였단다.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의 모습이 역동적이고
높이 38m(건물 29m,상륜부 9m)의 5층 목탑이 위압적인데,
주심포 하향식 구조로 정면 3칸,측면 3칸의 방형이며
심초석을 세우고 심주 3개를 이어 올려서 만들었다.
왕릉을 재현해 놓은 뒤편까지 둘러보고 나오는데
노래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공연장(?)으로 달려 가니
가야금 반주에 구성진 노래가 흘러 나온다.
하루 세번 공연을 한다는데 일정 때문에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성왕 16년(538) 천도한 뒤 123년간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지키는
중심 거점 이었던 扶蘇山城에 도착하여 간단한 설명을 듣고
길을 따라 가는데 단풍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길바닥에도 단풍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 늦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끼며 걸어 가니
三忠祠에 도달한다.
백제말 의자왕(641-660)에게 충성을 바친
성충,홍수,계백 세충신의 위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1957년 건립되었다.
주변은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듯 붉은 단풍이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 있다.
부소산성은 표고 106m의 야트막한 부소산의 완만한 구릉을 따라 이어져 있는데,
백제시대의 테뫼식과 신라 시대의 포곡식이 병용되 이루어져있다.
太子泉에 이르러 시원한 물 한그릇으로 목도 축이고
다시 길을 따라 가는데 단풍이 너무도 곱다.
扶蘇는 백제어로 소나무를 뜻한다는데 소나무보다 단풍이 더 많은듯 하다.
백마강이 반달 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의 남쪽 마루에 있는 半月樓에 오르니
부여시가지와 백마강이 시원스레 한눈에 들어 온다.
드디어 부소산성에서 제일 높은곳에 위치한 사자루에 이르렀다.
원래 달을 구경하는 頌月臺가 있었다니 늦은 밤 달구경하러 와야 하겠다.
길을 내려 가니 百花亭이 보인다.
백마강에 떨어져 내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 하기위해 1929년 낙화암 바위위에 세운 육각형 정자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려는 노부부의 모습이 위태롭게 느껴진다.
드디어 落花巖에 서니 백마강의 물길이 위협적으로 다가 온다.
백제 멸망의 날 궁녀들이 바위에서 꽃잎처럼 떨어저 백마강에 원혼을 묻은
망국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현장에 서니, 가슴이 또 시려 온다.
皐蘭寺로 내려가니 노란 은행잎이 소담스럽게 깔려 있고
본전 앞에도 커다란 은행나무가 마지막 은행잎을 화사하게 달고 있다.
백제 17대 아신왕때 혜인화상이 창건했다는 설과 왕실의 화려한 정자가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지금의 건물은 운산의 崇角寺를 옮겨 지은것이다.
고란사라는 이름은 절 뒤편의 바위에 피어있는 皐蘭草에서 유래된 것으로
잎은 홑잎으로 타원형태의 피침 모양이나 잎이 3갈래로 갈라진 것이 있는데
가운데 잎이 크고 표면은 녹색이며 뒷면은 연한 녹색이고
황색의 포자낭군이 측맥사이에 두줄로 원모양으로 달려있다.
왕들이 애용했다는 약수는 바위아래 깊숙한 곳에 고여 있는데
물이 시원하고 맛이 달착지근 하다.
한모금 마실때마다 3년이 젊어 진다니 배 부를때 까지 먹어보고 싶어 진다.
약수를 왕에게 바칠때 절벽의 고란초를 물에 띄워서 고란약수 라는것을 증명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 진다.
유람선 선착장에 이르니 오른편으로 釣龍臺가 보인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사비성을 침공하기 위해 강을 건너는데 용이 나타나
도강을 방해하자 白馬의 머리를 잘라서 미끼로 써서 龍을 낚았다는 곳이다.
침공을 미화하기 위해 조작된 전설이라고 생각되나
백제를 마지막 까지 지키려 했던 호국의 龍을 잡으려 썻던 미끼(白馬)에서 유래하여
白馬강이란 이름이 유래되지 않았나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다.
황포돛배에서 바라보니 백화정이 보일듯 하나
둘러볼 만한 것도 없고 돛도 펴지 않고 운행하니 멋도 없다.
구드레 쌈밥으로 배불리 점심을 먹고
定林寺址 전시관에 들어가서 의자왕의 바둑판을 구경하고
정림사의 복원 미니어쳐를 통해 절의 규모와 배치등을 가늠해 보고
오층석탑의 모형도 살펴 본 뒤에
바깥으로 나가니 定林寺址5층석탑이 늠름하게 우리를 반긴다.
국보 제9호로 높이 8.33m 이며 다듬고 마름질한 149매의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소정방이 초층 탑신 4면에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남겨서
"평제탑"이라고 잘못 알려 지기도 했는데,일제 강점기 조사과정에서 정림사라고
양각된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되어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 석탑으로
미륵사지석탑보다 뒤에 백제말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 된다.
상륜부는 없어지고 5층의 사리함은 일본인에 의해 도굴 되었는데
한국탑의 모범이며 기준이 되는 탑이다.
석탑의 정형화된 모습이 담겨 있지만 목조탑에서 보여주는 가구적인 수법이
그대로 계승되어 목조탑이 석조탑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뒤편의 건물 안에는 석불이 있는데 고려시대것으로
머리 부분은 훗날 연자방아를 깍아 다시 올려 놓았지만
좌대부분의 연꽃문양으로 미루어 볼때 아름다운 모습 이었을것으로 보인다.
돌아 오는길에 甲寺에 들리니
닭벼슬 같은 계룡산의 봉우리에 햇살이 가득하다.
秋 甲寺 라는 말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듯 일주문을 오르는 내내 단풍이 반겨주고
세월을 이긴 거목들이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四天王門을 지나자
범종루의 처마가 하늘을 향해 치솟고
계곡에는 마지막 잎사귀를 햇빛에 비추이는 노란 은행나무가 숨어 있다.
석양의 따뜻한 볕을 받고 있는 대웅전을 마지막으로 둘러 보고 내려 가는데
길가에 수줍게 서있는 단풍이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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