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여행/경상도여행

함양(벽송사,상림,농월정)

winwin55 2015. 4. 3. 12:19

2015.03.26

 

구례 산수유축제장을 떠나서 도착한 곳은 "碧松寺"다.

조선 중종때인 1520년 碧松 智嚴선사에 의해 창건 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道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禪敎를 겸수한 대종장을 108분 배출하여 이른바 "백팔조사 행화도량"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지리산의 천봉만학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蓮이 활작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 혹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의 형국에 자리한 사찰이다. 

입구 오른편에는 木長丞이 있는데,사찰에 들어 오는 악귀의 퇴치및 사찰 경내에서

행해지는 불법어로와 사냥의 금지,풍수지리상의 裨補역할등 다양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대략 일제 초기의 것으로 추정 된다.

왼쪽의 금호장군은 커다란 왕방울 눈을 빼고는 원래의 모습을 잃었으나

오른편의 호법대신은 거의 훼손되지 않은 모습이다.

머리와 큰 눈 큰 코,일자형 입과 수염이 매우 인상적으로 조각되어 있는 두 장승은

불교와 민간신앙이 어우러져 나타난 걸작 조형물이다.

경내의 마당에는 탑이 없고

"지리산벽송사"란 현판이 걸린 선원과

그 위로 "원통전"과 "산신각"이 자리 한다.

언덕을 오르니 "도인송"과 "미인송"이 자리 하고

道人松의 기개가 우람한데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 지며,

美人松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말이 전해 내려 오고 있으니 참고 바람.

미인송 옆에는 삼층석탑이 있는데 원래 벽송사 대웅전 동편에 세워져 있던것인데

사찰이 아래로 옮겨 져서 탑만 남게 되었다.

2중 기단위에 방형의 3층 탑신부를 이룬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계승했으나

사찰 창건시 세워진 것으로 판단 되며,탑의 상륜부에 복발과 노반이 남아 있다.

높이는 3.5m 이며 보물 제 474호로 지정 되었다.

사찰을 창건한 벽송선사는 "看話禪"수행법에 의해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은

조선의 첫번째 조사이며,서산대사가 3대 조사로 임진왜란때 승군을 일의켰는데

벽송사 선방에서 도인이 유래없이 많이 배출되어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여기서 생겨 났다고 한다.

한국전쟁때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어 국군에 의해 방화.소실되었으나

60년대 이후 久閒元應 대사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다음으로 瑞庵精寺를 찾았다.

입구부터 무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데

오른편 암벽에 사천왕상이 돋을 새김되어 있고

"암굴(?)"을 통과하자 비로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화엄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스님들이 가부좌를 틀고 바깥 출입을 하지 않으며 "용맹정진"하는 土堀의 모습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데,

대웅전의 모습과 색상도 특이하다.

2012년 완공한 "亞"자형 건물로 중층구조의 겹처마를 두어 한국 고건축의 선과 미를 극대화 했으며,석가모니불을 단독 봉안하고 있다.

뒤편으로 가니 石窟法堂인 "극락전"이 나온다.

아미타불을 위시해 8보살,10대 제자,신장상 등이 장엄 하면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데,6.25전쟁때 지리산 주변에서 희생된 원혼들을 달래고

남.북의 첨예한 대립의 벽을 허물어 모든 인류의 평화로운 이상세계가 실현되기를

발원하면서 1989년부터 10여년간 마애불을 조성 했다 한다.

"극락전"옆 계단을 오르니

"용왕전"이 자리하고

오른편 계단을 또 오르니 "산신각"과 "비로전"이 나온다.

"비로전"에 오르기위해 지났던 돌문을 지나 계단을 내려 와서

"범종각"옆 연못의 경치를 바라 보다가

담장 바깥쪽을 보니 스님들의 은밀한 수행 공간들이 보이고

방향을 틀어서 마을쪽을 보니 "칠선계곡"으로 가는 길이 마치 신선의 세계로 가는

"피안의 길"처럼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눈 부시다.

주차장에 내려와서 따뜻한 파전으로 속을 달래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悟道재"에 이르렀다.

마천면 삼정리 영원사 도솔암에서 수도하던 印悟祖師(1548-1623)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득도한 연유로 그 이름이 지어졌는데,"오도재(773m)는

삼봉산(1,187m)과 법화산(991m)이 만나는 지리산 관문의 마지막 쉼터로

"가야" 마지막 왕이 은거 피신할때 중요한 망루 지역이었고,

임진왜란 당시는 서산,사명,청매등 僧軍이 머물렀던 곳이며

영남학파 종조인 김종직선생을 비롯하여 정여창,유호인,김일손 등

많은 시인,묵객들이 걸음을 멈추며 지리산을 노래 했던곳 이다.

 

 

"咸陽 上林"에 도착했다.

천연기념물 제 154호로 신라 진성여왕(887-897)대 천령(함양)군 태수였던

"고운 최치원"선생이 마을과 농경지를 보호하려고 조성한 인공림이다.

이 숲은 처음에 大館林이라고 이름지어 잘 보존 되었으나

큰 홍수로 중간부분이 유실되어 上林과 下林으로 나뉘어지고

下林은 많이 훼손 되었지만 上林은 당시 숲 모습을 그대로 유지 하고 있다.

숲 면적은 약 21ha이고 120여 종류의 수목 2만여 그루가 생육하고 있다.

 

咸化樓는 원래 조선시대 함양 읍성의 南門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에서 강제 철거 하려고 하자 1932년 함양 고적보존회 대표

"노덕영"선생이 사재를 들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본래의 이름은 지리산이 보여서 望岳樓라 했는데 옮기면서 "함화루"로 고쳤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에

별다른 장식을 사용하지 않은 소박한 누각이다.

 

"함양읍 만세기념비" 부근에

吏隱里 石佛이 있는데,1950년 "이은리"냇가에서 출토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광배와 받침대를 모두 갖추고 있으나 두 손이 떨어져 나가고 없으며

훼손된 가슴 아래부분은 시멘트로 복원되어 있다.

머리는 민머리이며 상수 모양은 단정한 편이고 얼굴표정은 소박하고

두 귀는 길고 목에는 세겹의 주름(三道)이 선명하다.

타원형의 광배는 이중의 원형선을 두른 頭光과 身光으로 이루어져 있고

머리 부분에는 연꽃무늬를 돋을새김으로 장식하였다.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 된다.

上林을 떠난 우리는 "함양 선비길" 亭子 탐방을 시작했다.

弄月亭을 찾아 가는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기품이 있었고

夕陽의 햇살은 신비 스럽게 일렁인다.

그러나 개울의 너른 반석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글귀만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한쪽 너른 바위에 심상치 않은 붉은 글씨가 눈에 들어 온다.

弄月亭은 조선 중기때의 학자인 "지족당 박명부(1571-16390)"가

광해군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가 파직되자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심신 수련을 했으며,

1637년 정자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쉬던곳이다.

정자는 2003년 방화로 추정되는 방화로 소실되어 아쉽지만

정자앞 오른쪽 암반에는 "선생께서 지팡이를 짚고 노닐던 곳"이라는 뜻의

"知足堂杖구之所"라는 글자를 후손들이 힘있게 새겨 놓아 그 정취를 가늠해 본다.

아쉬움에 약 1,000 여평이나 되는 달바위를 비롯한 주변의 너른 암반을 돌아 보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소용돌이 치는 물을 바라 보다가

안내판에 표시된 九老亭을 찾았다.

월림리 황대입구에 위치한 정면 2칸 측면 2칸의 소박한 정자는 팔작지붕이며

철종 5년 갑인년(1854)에 태어난 9명의 선비들이 갑계를 모아 정자를 세우고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1979년 후손들이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저녁에는 된장찌개와 묵무침으로 만찬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