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12
"高敞"을 지나 다니기만 하다가 오늘은 읍성을 구경하러 들어갔는데,
뜻밖에 오른편에 "申在孝" 고택이 있다.
동리 신재효(1812-1884)가 살면서 후학을 양성 하던 곳으로
조선 철종 1년(1850) 건립되었다.
원래는 주변의 물을 끌어 마루 밑을 통해 서재밖 연못으로 흘러 가도록 만든
운치있는 집 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파 묻히고 연못만 복원 되었다.
심청가,적벽가,춘향가,토끼타령,박타령,변강쇠(가루지기)타령 등
판소리 6마당의 체계를 세웠으며 판소리의 창극화와 함께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 하는등 판소리 발전에 커다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오후 6시가 넘어서 관람료 @1,000원을 면제 받아 그런지
입구에서 바라본 "高敞邑城"의 모습은 따스하기만 하다.
일명 "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단종 원년(1453)에
倭侵을 막기 위해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나주 진관의 "笠巖山城"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로
1965년 사적 제 145호로 지정 보존 되고 있다.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m 로 동,서,북문과 3개소의 "甕城"과
6개소의 "稚城", 성 밖의 "垓疵"등 전략적 요충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정문인 "拱北樓(北門)"는 낮은 기단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고
배면은 화강석 돌기둥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만든 2층 문루다.
성문 앞에는 적으로 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쌓고 그 위에 "女墻"을 쌓아
성 안에서 밖을 살필 수 있는 "懸眼"과 총을 쏠 수 있는 "銃眼을 만들어 놓았다.
윤달 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3회 돌면 무병 장수하고 극락 승천한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부녀자들의 "踏城"풍속이 남아 있다.
왼편에 죄인을 가두는 "獄"이 있는데 동쪽 칸과 서쪽 칸에 남,여 옥을 나누어 만들고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서 "圓獄"이라고도 부른다.
우선 성곽 위를 돌아 보기로 하고 오른편 성곽에 올랐다.
성곽은 지형을 따라 나즈막 하게 올라 가는 형상이고
안쪽에는 "鄕廳"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안내도에는 없다.
그러나 툇마루,대청,온돌방,누각등 모든 한옥의 요소를 두루 갖춘 멋진 건물이다.
오르막이 끝날즈음 "西北稚"가 나오고
휘어지는 성곽을 따라가자 "陣西樓(西門)"가 나온다.
이곳도 "甕城"이 둘러쳐 있고
"옹성"에는 "여장"이 둘러쳐 있고 "현안"과 "총안"이 설치되었다.
"진서루"를 지나자
성곽 안쪽으로는 아름다운 松林이 펼쳐지고
오르막 부근에 "西南稚"가 나타난다.
이후로는 평탄한 성곽위를 걸어가니 곧 이어 "南稚"가 보이고
왼편의 소나무 숲을 구경하며 걷다보니 "東南稚"가 나온다.
늘씬한 소나무 사이에는 성곽을 따라 휘어지는 오솔길이 있는데
그곳을 걸으면 왠지 무병장수 할 것 같은 아름다운 길이다.
松林은 성곽과 어우러져서 멋진 경치를 만들어 내고
유려한 모습으로 휘어진 소나무의 자태에 눈길을 빼았기며 걷다보니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나오고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東稚"에 도착 했으니 성곽의 3/4정도 돌아본 듯 하다.
길게 늘어선 성벽 중간쯤에 "登陽樓(東門)"이 보인다.
"등양루"도 다른 2개의 문과 동일하게 "옹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주위의 소나무 숲이 또 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성벽의 풍성한 담쟁이들과 소나무에 둘러 쌓인 모습이 포근하고
3개의 성문 중에서 제일 멋스러운 맛이 풍긴다.
성벽을 따라 걸으니 마지막 "稚城"인 "東北稚"가 나오고,
발 아래에 "공북루"가 보인다.
어느덧 성곽을 한바퀴 돌아 온 것이다.
들어 오면서 보았던 "獄"의 둥근 담장이 기와 선과 어우러지는
멋진 조형미를 감상하고서
"拱北樓"의 "옹성"에 올랐다.
이곳에도 "여장(女墻)"에 "총안(銃眼)"이 촘하게 설치되어
완벽한 방비태세를 엿볼 수 있었고
적으로 부터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甕城)"의 기능을 알 수 있을듯 하다.
이제 城 안쪽을 살펴 볼 차례다.
운치있게 조성된 오솔길이 보였지만 건물들을 보려고 너른 길을 택했다.
왼편 나즈막한 언덕위에 "官廳"이 보인다.
"관주(官廚)"라고도 하는데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곳으로
守令과 그 가족들의 식생활을 비롯하여 빈객(賓客)의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사무를 관장 하던 곳이다.
다음에는 "작청(作廳)"이 나온다.
"질청"이라고도 하는데 이방(吏房)과 아전(衙前)들이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다.
城의 뒤편 중간쯤에 이르자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기다란 건물이 보인다.
중앙의 맞배지붕 건물을 두고 좌,우로 팔작지붕 건물이 날개를 펼친듯한 모습이다.
조정에서 파견 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高敞客舍"로
중앙의 몸체(正堂)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展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때
대궐을 향해서 禮를 올린곳이다.
"모양지관(牟陽之館)"은 이 고장을 "모양고을" 이라 하였고
이 성을 "모양성"이라 불러 온대서 비롯된 堂號이다.
객사에서 내려가는데 왼편 언덕위에 아담한 건물이 보인다.
"장청(將廳)"으로 지방을 지키는 "속오군(束伍軍)"의 우두머리인 현감과
병방,군교들이 군무를 보던 청사이다.
"장청"을 지나자 "동헌"이 나온다.
조선시대 목(牧)과 도호부,군현등 각 행정단위에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다.
건물 정면에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의
"平近堂"이란 현판이 있다.
"동헌"옆에는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인 "內衙"가 있는데
사무를 보던 공간을 "외동헌",살림집을 "내동헌"이라 한다.
조그만 연못 옆에 "지석묘"가 있는데
죽림리 일대의 지석묘가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으로 결정된 기념으로
제25회 모양성제(1999.10.28)때 강호상공고 재학생 200여명이
지석묘 축조과정을 재현하면서 만든것 이란다.
"지석묘"를 보고 나오니 2층 누각이 나를 맞이한다.
"豊和樓"라는 현판이 있는데 최근 복원한 것이며
"풍년과 고을의 평화를 기원한다."는 글씨는 石田 黃旭선생이 92세때 쓴 글씨란다.
"풍화루"옆 약수터까지 두루 구경하고 나니
어느덧 어둠이 내린다.
이제 읍성을 2번 돌았으니 2/3 만큼 무병장수한 셈이다.
마지막 한 바퀴는 다음을 위해서 남겨 두고 "牟陽城"과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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